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문단 편집) ===== [[브루실로프 공세]] =====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브루실로프]]는 빨리 공세에 나서고 싶었지만, 러시아군의 주공 실시 일자가 결정되기까지는 공세 개시일을 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헝 제국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공세(5월 트렌티노 공세)를 위해 10개가 넘는 사단을 빼며 전선에 공백이 생겼다는 것을 간파했다. 초반 전투에서 제국군의 맹공에 대패한 이탈리아군이 황급히 러시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브루실로프]]의 공격 준비는 다른 러시아군의 진척 상황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미하일 알렉세예프]]는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브루실로프]]에게 단독으로 공세에 나설 수 있는지 물었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브루실로프]]는 최대한 공세에 나서고 싶었기에 제안을 수락한다. [[1916년]] [[6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모든 동부전선에 걸쳐 [[러시아 제국군]]의 일제 포격이 개시되는 것으로 [[브루실로프 공세]]의 막이 올랐다. 새벽 4시 30분에 시작된 러시아군의 공격 준비 사격은 남쪽 구역에서는 정오까지, 북쪽 구역에서는 12시 반까지 계속되었다. 포격이 멈추자 러시아군 보병들이 제국군의 참호를 향해 달려들어 저녁 무렵에 공격 지역의 모든 제국군 참호선을 점령했다. 러시아군은 꾸준한 항공정찰과 관측으로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호선의 중요 시설과 취약점의 위치를 파악한 상태였고, 정확하기 그지없는 포격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참호선은 곳곳에서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예비 병력이 제대로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막았고, 초기 러시아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6월 4일]], 콘라트는 [[트렌티노 공세]]를 중지하고 [[에리히 폰 팔켄하인|팔켄하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에리히 폰 팔켄하인|팔켄하인]]은 3개 사단을 서부전선에서 차출하여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보내면서 이탈리아 전선을 끝내고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보내야만 독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것이라고 경고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5개 사단을 급히 남쪽으로 내려보냈고, 제4군 사령관 [[요제프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토스카나|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을 해임하고 [[카를 테르슈찬스키 폰 나더시]] 중장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6월 8일]], 콘라트의 지원 요청에 응하여 [[에리히 폰 팔켄하인|팔켄하인]]은 린징엔의 지휘 아래 5개의 사단을 조직하여 반격을 위해 [[코벨(도시)|코벨]] 근처에 집중시켰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브루실로프]]는 북쪽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이동했고 러시아군은 남서부 전선을 따라 계속해서 압박을 유지했다. 한편, [[카를 폰 플란처발틴|플란처발틴]] 제7군 사령관은 국지적으로 러시아에게 반격을 가하면서 그 틈을 타서 강 동쪽 제방에 구축한 교두보에서 철수할 준비를 했다. [[6월 10일]], 제국군은 프루트강을 향해 철수했다. 며칠간에 걸쳐 쏟아진 호우가 러시아군의 추격에 막대한 지장을 주면서 제국군은 전멸당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제국군이 프루트강 건너편으로 쫓겨나자, 이제 제국군이 강 동안에 확보하고 있는 거점은 [[부코비나 공국|부코비나]]의 수도인 [[체르니우치|체르노비츠]] 바로 북쪽에 위치한 교두보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제국군은 이 교두보를 5일간 지켰지만, [[6월 19일]]이 되자 이 교두보도 러시아군에게 점령당했고 그로부터 이틀 후 [[카를 폰 플란처발틴|플란처발틴]]은 세레트강을 향해 퇴각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패배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는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위협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병력을 지원한다. 제국군은 [[6월 23일]]까지 20만 4000명이 포로로 잡히면서 큰 병력 손실을 입었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브루실로프]]는 공세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 철도교통의 요충지인 코벨의 탈환에 전력을 기울였다. 러시아는 동원가능 병력은 많았지만 산업화의 미비로 철도 총연장거리나 노선 접근성이 안 좋았다보니 예비병력의 전선동원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철도]]로 병력을 대규모로 증원하면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7월 24일, 그렇게 시작된 코벨 전투는 2주간의 공세 끝에 러시아군의 패배로 끝났다. 사실 병력 면에서는 러시아군이 2배나 많았지만 급히 차출된 독일-오스트리아 병력들이 성공적으로 지연방어전을 치렀으며,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브루실로프]]의 주특기였던 정밀포격과 충격부대의 기용도 제공권을 쥔 독일군에 의해 제대로 된 항공정찰을 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전장의 주도권은 여전히 러시아군이 쥐고 있었지만 초전의 기세를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하고 진격이 둔화된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브루실로프]]의 우려대로 코벨을 탈환하는데 실패하자 독일 제국군은 서부전선에서 계속해서 병력을 차출했다. 특히 문제의 베르됭 전투가 7월에 종료되면서 독일 제국군도 서부전선에서 방어전으로 전환하고 남는 전력을 동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는 결정적이었다. 여전히 러시아군은 6월 4일과 비교해서 훨씬 서쪽인 약 100km 깊숙히 진격한 상태였지만 코벨에서의 패배 이후 공세능력을 상실해 버렸고 전선이 돌출부를 형성하게 되어 역으로 조금씩 후퇴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의 지휘부는 공세를 지속하길 원하며 북부전선의 예비전력과 자원을 쏟아 부었는데, 러시아의 낙후된 철도환경은 이러한 예비전력의 효율적 재배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고, 무의미한 공세만 지속시킬 뿐이었다. [[7월 26일]], [[에리히 폰 팔켄하인|팔켄하인]]은 테셴에 있는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프리드리히 대공]]의 사령부에 나타나 동맹군에게 동부전선에서 통일된 최고 사령부를 구축할 것을 촉구했다. [[7월 27일]],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베트만홀베크]],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루덴도르프]]는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콘라트를 만났다. 코벨이 러시아군에 의해 위험에 처했기에 이를 대비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작전회의를 했다. 그 결과 지휘 구역이 개편되어 [[7월 28일]]부로 힌덴부르크가 거의 모든 동부전선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부여받았는데, 이에 콘라트는 반발하였으나 독일의 도움없이는 오헝 제국군으로는 전쟁을 할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한 했기에 명분도 실리도 잃어버린 콘라트로서는 지휘권을 양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힌덴부르크에게 협조하면서도 독일 남부군과 제7군은 [[카를 1세|카를 대공]]과 AOK의 통제하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딴지를 걸었다. [[8월 7일]], 코벨을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재개했으나, 독일 제국군과 오헝 제국군의 격렬한 방어끝에 양측의 피해만 커지며 진전은 더디기만 하였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브루실로프]]는 더 이상의 공세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진작 깨닫게 되었고, 이틀 만에 코벨을 점령하려는 시도를 중단한다. 이후, 계속 상부를 설득하여 9월 20일부로 공세를 종료했다. 동부전선으로만 보면 러시아 입장에서 브루실로프 공세는 대성공이었다. 성과를 보면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전선을 움직여 안전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무력화시켜 이후 동부전선에서 사실상 손떼게 만들었고, [[루마니아 왕국]]이 협상국 편에 가담하도록 자극하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이로 인하여 [[8월 29일]], 독일에서는 장군참모장이 [[에리히 폰 팔켄하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로 교체되기까지 한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는 병참장군으로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임명한다. 기존의 관념을 타파한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브루실로프]]의 참신한 발상이 빛을 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러시아가 치른 희생은 매우 컸다.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55만 명 이상에 달했고, 40만 명의 전선군 예비 병력 가운데 4분의 3이 소모되었다. 공세를 지휘한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브루실로프]]는 온갖 [[훈장(상훈)|훈장]]을 수여받고 페트로그라드의 궁정으로부터 수많은 축하도 받았으나, 정작 본인은 막대한 병력 피해와 유의미한 전략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에 아쉬워했다. 결국 이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는 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8월 12일]]까지 지속된 브루실로프 공세로 8,255명의 장교와 37만 153명의 동맹군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전사자와 부상자까지 고려하면, 동맹군은 70만 명 이상의 병력과 1만 5,000제곱마일의 지역을 잃었다. 갈리치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10개 사단을 손실했으며, 결국 동부전선은 [[브루실로프 공세]]로 초토화되었다. 잇따른 패배로 인하여 콘라트는 [[독일 제국]]에 의해 [[동부전선]]에서 점차 소외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